페루-볼리비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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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볼리비아 연합은 1836년부터 1839년까지 존재했던 단명한 국가 연합으로, 페루와 볼리비아를 통합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의 주도하에 북부 페루, 남부 페루, 볼리비아의 세 공화국으로 구성되었으며, 타크나 조약을 통해 정부 형태와 국기를 정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 칠레, 아르헨티나와의 갈등, 그리고 내부의 분열로 인해 1839년 융가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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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볼리비아 연합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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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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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적인 긴 이름 | 페루-볼리비아 연합 |
통칭 | 페루-볼리비아 연합 |
표어 | Firme por la Unión (단결을 위하여 굳건히) |
국가 | 페루의 국가 |
수도 | 타크나 |
공용어 | 스페인어 |
구성국 | 북페루 남페루 볼리비아 |
정부 형태 | 연합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
최고 보호자 |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
최고 보호자 시작 | 1836년 10월 28일 |
최고 보호자 종료 | 1839년 2월 20일 |
설립 사건 | 법령에 의해 설립 |
설립일 | 1836년 10월 28일 |
주요 사건 1 | 타크나 조약 |
주요 사건 1 날짜 | 1837년 5월 1일 |
주요 사건 2 | 융가이 전투 |
주요 사건 2 날짜 | 1839년 1월 20일 |
해체 사건 | 해체 선언 |
해체일 | 1839년 8월 25일 |
해체 후 사건 | 이키차의 항복 |
해체 후 날짜 | 1839년 11월 15일 |
통화 | 페루 레알, 볼리비아 솔 |
이전 국가 1 | 페루 |
이전 국기 1 | Flag of Peru (1825–1884).svg |
이전 국가 2 | 볼리비아 |
이전 국기 2 | Flag of Bolivia (state, 1826-1851).svg |
이후 국가 1 | 페루 |
이후 국기 1 | Flag of Peru (1825–1884).svg |
이후 국가 2 | 볼리비아 |
이후 국기 2 | Flag of Bolivia (state, 1826-1851).svg |
현재 국가 |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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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9세기 초, 시몬 볼리바르는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구상을 제시했는데, 이는 상 페루로 알려진 볼리비아와 페루를 통합하려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의 생각과 일치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루나 피사로, 호세 마리아 판도, 마누엘 로렌소 데 비다우레, 아구스틴 가마라 등 페루의 여러 유력 정치 지도자들도 페루와 볼리비아의 통합에 찬성했지만, "연합"의 형태(연방 또는 합병)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이 두 지역 간의 역사적 유대감은 독립 이후에도 통합을 추구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1]
1835년, 정치적 불안정과 쿠데타 이후 펠리페 산티아고 살라베리와 루이스 호세 데 오르베고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오르베고소는 볼리비아 대통령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에게 군대를 페루 국경으로 파병하도록 허용했다.[2] 1836년 산타 크루스가 승리한 후, 연방 건설을 위한 의회가 곧 설립되었다.
2. 1. 배경
19세기 초, 시몬 볼리바르는 하나의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생각을 제시했는데, 이는 상 페루로 알려진 볼리비아와 페루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고 생각한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일치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를 통합하려는 생각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루나 피사로, 호세 마리아 판도, 마누엘 로렌소 데 비다우레, 아구스틴 가마라 등 여러 페루의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으며, 그들은 "연합"의 형태(연방 또는 합병)에 대해서만 의견이 달랐다. 이 두 국가를 통합하려는 욕구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독립 이후에도 두 지역 간의 역사적 유대감이었다.[1]1835년 정치적 불안정과 쿠데타 이후, 새로 자칭한 대통령 펠리페 산티아고 살라베리와 헌법상 대통령 루이스 호세 데 오르베고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는데, 오르베고소는 볼리비아 대통령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페루 국경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도록 허용했다.[2] 1836년 산타 크루스의 승리 이후, 연방 건설을 위한 의회가 곧 설립되었다.
2. 2. 내전과 연방 결성
19세기 초, 시몬 볼리바르는 하나의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생각을 제시했는데, 이는 상 페루로 알려진 볼리비아와 페루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고 생각한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일치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를 통합하려는 생각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루나 피사로, 호세 마리아 판도|호세 마리아 판도es, 마누엘 로렌소 데 비다우레|마누엘 로렌소 데 비다우레es, 아구스틴 가마라 등 여러 페루의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으며, 그들은 "연합"의 형태(연방 또는 합병)에 대해서만 의견이 달랐다. 이 두 국가를 통합하려는 욕구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독립 이후에도 두 지역 간의 역사적 유대감이었다.[1]1835년 정치적 불안정과 쿠데타 이후, 펠리페 산티아고 살라베리와 루이스 호세 데 오르베고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는데, 오르베고소는 볼리비아 대통령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페루 국경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도록 허용했다.[2] 1836년 산타 크루스의 승리 이후, 연방 건설을 위한 의회가 곧 설립되었다.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세 창립국 각각에 두 개의 구성 의회가 설립되었는데, 와우라(페루 북부), 시쿠아니(페루 남부), Tapacarí|타파카리es(볼리비아) 도시에 설립되었다. 세 주의 대표들은 즉시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연합 조약을 가능한 한 빨리 체결할 것을 약속했다.
시쿠아니 의회는 1836년 3월 16일에 설립되어 3월 22일에 폐회되었다. 이 의회에는 아이쿠초, 아레키파, 쿠스코, 푸노, 타크나의 대표들이 참석했다.[3] 4월 10일, 오르베고소는 법령을 통해 남부 페루를 독립국으로 인정했고, 8월 24일에는 쿠스코에 대법원이 설치되었다. 의회는 또한 국기와 화폐를 제정했다. (현재 북부) 페루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금이 부과되었다.[4]
와우라 의회는 1836년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라 리베르타드, 리마, 와이야스, 마이냐스, 후닌의 대표들이 참석했다.[3] 8월 11일, 당시 대통령 오르베고소가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북부 페루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8월 15일 리마에 개선 입성한 산타 크루스를 국가의 최고 보호자로 임명했다. 오르베고소는 사임을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그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의회는 또한 새로운 국가의 영토 구분을 확립했다.[5] 북부 페루는 남부 페루와는 달리, 전임 국가의 국가 상징을 유지했다.[6]
볼리비아의 경우, Tapacarí Congress|타파카리 의회es의 특별 회의가 1836년 6월 21일에 이미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산타 크루스는 볼리비아가 이미 1835년 7월 22일 법률에 따라 동의한 연방 프로젝트를 완료하도록 허가했다. 그 무렵, 산타 크루스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대십자 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프랑스 국왕이 그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서한과 교황 자신이 축복한 훈장이 달린 묵주를 받았다.[7]
2. 3. 연방 설립 과정
와우라, 시쿠아니, Tapacarí|타파카리es에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세 창립국 각각에 두 개의 구성 의회가 설립되었다. 세 주의 대표들은 즉시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연합 조약을 가능한 한 빨리 체결할 것을 약속했다.시쿠아니 의회는 1836년 3월 16일에 설립되어 3월 22일에 폐회되었다. 이 의회에는 아이쿠초, 아레키파, 쿠스코, 푸노, 타크나의 대표들이 참석했다.[1] 4월 10일, 오르베고소는 법령을 통해 남부 페루를 독립국으로 인정했고, 8월 24일에는 쿠스코에 대법원이 설치되었다. 의회는 또한 국기와 화폐를 제정했다. (현재 북부) 페루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금이 부과되었다.[2]
와우라 의회는 1836년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라 리베르타드, 리마, 와이야스, 마이냐스, 후닌의 대표들이 참석했다.[1] 8월 11일, 당시 대통령 오르베고소가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북부 페루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8월 15일 리마에 개선 입성한 산타 크루스를 국가의 최고 보호자로 임명했다. 오르베고소는 사임을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그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의회는 또한 새로운 국가의 영토 구분을 확립했다.[3] 남부 페루와는 달리, 북부 페루는 전임 국가의 국가 상징을 유지했다.[3]
볼리비아의 경우, Tapacarí Congress|타파카리 의회es 특별 회의가 1836년 6월 21일에 이미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산타 크루스는 볼리비아가 이미 1835년 7월 22일 법률에 따라 동의한 연방 프로젝트를 완료하도록 허가했다. 그 무렵, 산타 크루스는 프랑스 국왕이 수여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서한과 교황 자신이 축복한 훈장이 달린 묵주를 받았다.[4]
세 주(州) 의회에서 부여한 모든 법적 요소를 갖춘 산타 크루스는 1836년 10월 28일 리마에서 칙령을 통해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설립을 선포했다.[4][5] 오늘날 '''타크나 의회'''(Congreso de Tacna|타크나 의회es)로 알려진 의회가 연방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타크나에서 소집될 것을 명령받았다. 또한 아리카에 관세청이 설립되어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사람들이 모두 근무했다.[6]
회의 기간 동안 산타 크루스는 각 주가 사제, 군인, 변호사를 대표자로 파견하도록 준비했고, 그 결과 세 명의 종교인, 세 명의 변호사, 세 명의 군인이 타크나로 향했다. 아홉 명의 대표자는 다음과 같다.
페루 북부 대표 | 페루 남부 대표 | 볼리비아 대표 |
---|---|---|
처음에는 1837년 1월 24일을 의회 개최일로 정했지만 연기해야 했다. 산타 크루스는 페루 북부 주의 전권대표들을 동행하기로 결정하여 2월 9일 리마를 떠나 플로라(Flora) 호위함에 승선했지만, 이스라이에 상륙하는 대신 아리카로 가서 2월 27일에 도착했다. 의회는 4월 18일로 연기되었고, 그동안 산타 크루스는 아리카에 머물렀지만 3월 2일 타크나로 향했고, 그곳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타크나에서 그는 3월 10일 비아차로 가서 다음 날 라파스에 도착했다. 거기서 볼리비아 전권대표 아기레와 부이트라고, 그리고 볼리비아 부통령 마리아노 엔리케 칼보와 함께 타크나에서 논의하고 승인해야 할 계획에 합의했다. 그런 다음 4월 초에 다시 타크나로 내려갔다.
1837년 4월 18일, 아홉 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타크나 의회가 개막되었다. 타크나 조약(Pacto de Tacna|타크나 조약es)은 의회에서 논의 없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국가가 운영될 법적 틀을 설정했고, 국기 디자인도 포함했다.[7] 조약에 대한 반응은 서명자들 사이에서 엇갈렸고, 의견 차이로 인해 회원국별로 하나의 제헌 의회를 설립하게 되었다.[8] 이 법령은 나중에 1837년에 공포되었다.
2. 4. 타크나 의회와 타크나 조약
산타 크루스는 1836년 10월 28일 리마에서 칙령을 통해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설립을 선포했다. 오늘날 '''타크나 의회'''(Congreso de Tacnaes)로 알려진 의회가 연방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타크나에서 소집될 것을 명령받았다. 또한 아리카에 관세청이 설립되어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사람들이 모두 근무했다.[1][2]산타 크루스는 각 주가 사제, 군인, 변호사를 대표자로 파견하도록 준비했고, 그 결과 세 명의 종교인, 세 명의 변호사, 세 명의 군인이 타크나로 향했다. 아홉 명의 대표자는 다음과 같다.
페루 북부 대표 | 페루 남부 대표 | 볼리비아 대표 |
---|---|---|
페루-볼리비아 연합은 1837년 기본법에 따라 각 구성 공화국에 자체적인 "임시 대통령"을 두었다. 이들은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원수의 "최고 보호자" 지위 아래 있었으며, 산타 크루스는 볼리비아 대통령직도 겸임했다.
처음에는 1837년 1월 24일을 의회 개최일로 정했지만 연기해야 했다. 산타 크루스는 페루 북부 주의 전권대표들을 동행하기로 결정하여 2월 9일 리마를 떠나 플로라(Flora) 호위함에 승선했지만, 이스라이에 상륙하는 대신 아리카로 가서 2월 27일에 도착했다. 의회는 4월 18일로 연기되었고, 그동안 산타 크루스는 아리카에 머물렀지만 3월 2일 타크나로 향했고, 그곳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타크나에서 그는 3월 10일 비아차로 가서 다음 날 라파스에 도착했다. 거기서 볼리비아 전권대표 아기레와 부이트라고, 그리고 볼리비아 부통령 마리아노 엔리케 칼보와 함께 타크나에서 논의하고 승인해야 할 계획에 합의했다. 그런 다음 4월 초에 다시 타크나로 내려갔다.
1837년 4월 18일, 아홉 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타크나 의회가 개막되었다. 타크나 조약(Pacto de Tacnaes)은 의회에서 논의 없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국가가 운영될 법적 틀을 설정했고, 국기 디자인도 포함했다.[3] 조약에 대한 반응은 서명자들 사이에서 엇갈렸고, 의견 차이로 인해 회원국별로 하나의 제헌 의회를 설립하게 되었다.[4] 이 법령은 나중에 1837년에 공포되었다.
3. 정부와 정치
각 공화국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다.공화국 대통령 볼리비아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장군 북 페루 루이스 호세 데 오르베고소 이 몬카다 장군 (1837년 8월 21일 – 1838년 7월 30일)
호세 데 라 리바 아구에로 장군 (1838년 8월 1일 – 1839년 1월 24일)남 페루 라몬 에레라 이 로다도 장군 (1837년 9월 17일 – 1838년 10월 12일)
후안 피오 데 트리스탄 이 모스코소 (1838년 10월 12일 – 1839년 2월 23일)
헌법상 각 공화국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체 정부를 가졌지만, 중앙 정부의 권한 아래에 있었다. 중앙 정부의 권한은 다음과 같았다.
헌법은 연방의 깃발도 정의했다.
4. 행정 구역
북페루 | 남페루 | 볼리비아 | 특별 행정구역 |
---|---|---|---|
5. 대외 관계
- '''아르헨티나''': 볼리비아가 분쟁 지역인 타리하 주를 점령하고 병합한 후, 아르헨티나는 1837년 5월 19일 페루-볼리비아 연방에 선전포고했다. 전쟁 후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볼리비아 국가와 영토 문제를 협상했고, 타리하는 결국 볼리비아에 남게 되었다.
- '''브라질''': 브라질 외교관 두아르테 다 폰테 리베이루는 1829년 페루 주재 브라질 대리공사로 임명되었고, 1836년 연방 수립 후에도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8] 연방 해체 후에도 그는 페루 대표로 남아 1841년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9][10]
- '''중앙아메리카 연방''': 모라산과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만난 적이 없다.
- '''칠레''': 칠레는 남태평양 무역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연방 수립 후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페루의 지원을 받은 실패한 해군 침공으로 1836년에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칠레의 지원을 받은 페루 남부 해군 침공으로 이어졌으며, 1837년 파우카르파타 조약을 통해 관계가 재수립되었다.
- '''에콰도르''': 당시 에콰도르 대통령인 비센테 로카푸에르테는 칠레가 에콰도르의 참전을 반복적으로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대신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과야킬 주재 페루 영사에 따르면, 후안 호세 플로레스의 지지자들은 전쟁에 칠레와 함께 참전하기를 열망했다. 산타 크루스 정부는 반란 지도자 호세 마리아 우르비나와 후안 오타멘디를 하우하로 보내고, 반란 에콰도르인들을 시에라에 수용하는 등 에콰도르를 편들었다. 에콰도르는 연방의 3개 회원국과 조약을 체결했지만, 1837년 플로레스의 영향 아래 에콰도르 의회에서 무효화되었다. 연방 해체 후 과야킬에 있는 영사관은 새로운 페루 정부로 이전되었다.[6]
- '''프랑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 정부는 연방 해체 후 망명한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에게 망명을 제공했다.
- '''영국''': 영국 정부는 1837년 파우카르파타 조약의 보증인 역할을 했다. 조약이 무효화되자 영국 총영사는 빅토리아 여왕이 전쟁 지속을 불허한다는 뜻을 칠레 정부에 통보했다. 당시 대리 공사인 벨포드 힌턴 윌슨은 리마에 있는 영국 상품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했고, 나중에 이 상품들은 칼라오로 옮겨졌다.
- '''멕시코''': 호세 후스토 코로 정부는 페루와 볼리비아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 '''그란 코롬비아''': 칠레 장관 벤투라 라발레가 갈등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했을 때, 당시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는 칠레와 함께 그 국가가 지역에 대한 위협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산타 크루스 정부와 개인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 국가가 산타 크루스 정부와 볼리비아의 페루 요소 간의 기능 장애로 인해 멸망할 운명이라고 믿었으며,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에콰도르의 중재를 수락할 것을 권고했다.
- '''파라과이''':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랑시아 정부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 '''스페인''': 스페인은 독립 전쟁으로 인한 소규모 충돌로 인해 페루나 볼리비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방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 '''미국''': 연방은 1837년 3월 16일에 미국에 의해 인정되었고, 제임스 B. 손튼은 새로운 국가에 대한 대리 공사로 임명되었다. 1839년 국가 해체 후 미국은 1848년까지 볼리비아를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11]
- '''우루과이''': 마누엘 오리베와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만난 적이 없다.
6. 붕괴
칠레 의회는 1836년 12월 26일 산타 크루스의 페루 통치가 불법이며 그의 영향력이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통합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선전포고를 승인했다.[4]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간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면서, 볼리비아가 타리하 지역을 점령하고 병합했고,[5]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837년 5월 19일 산타 크루스가 연합당 지지자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비난하며 연방에 선전포고했다.
킬로타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 포르탈레스가 발파라이소에서 암살당하면서 남부 페루 침공 준비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복고 원정"은 1837년 9월 15일 발파라이소를 출발하여 킬카에 상륙하고 10월 12일 아레키파를 점령했다. 11월 17일, 칠레군이 페루군에 포위된 후 마누엘 블랑코 엔칼라다가 파우카르파타 조약에 서명했지만, 칠레 정부는 이 조약을 거부했다. 마누엘 불네스가 이끄는 두 번째 원정대가 조직되어 1838년 7월 19일 페루로 출발했다.
같은 시기에, 북부 페루는 1838년 7월 30일 연방에서 탈퇴했지만,[6] 1838년 8월 21일 포르타다 데 기아스 전투에서 통합 복원군에 패배했다.[6] 한편, 칼라오의 연방군은 포위 공격을 받았다. 1838년 9월까지 페루는 7명의 대통령의 ''사실상'' 통제하에 놓이며 안정성이 무너졌다.[6]
산타 크루스는 1838년 11월 10일 리마를 점령했지만, 1839년 1월 20일 융가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연방은 해체되었고,[6] 가마라는 1839년 8월 25일에 해체를 선포했다.[6] 산타 크루스는 에콰도르의 과야킬을 거쳐 유럽으로 망명했다. 연방이 패배한 후, 안토니오 우아차카는 패배할 때까지 새로운 페루 정부에 맞서 싸웠다.[7]
6. 1. 정치적 불안정과 전쟁
오르베고소와 마찬가지로 산타 크루스 또한 페루 공화국 초창기 잦은 카우딜로(caudillo) 충돌에서 비롯된 많은 반대자와 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적들 중에는 당시 칠레에 망명 중이었던 아구스틴 가마라와 라몬 카스티야와 같은 강력한 인물들이 있었다.[4]연방의 수립으로 칼라오와 발파라이소 항구 사이에 존재하던 경쟁이 악화되었다. 양국 간에 관세 전쟁이 곧 시작되었고, 오르베고소는 라몬 프레이레의 디에고 포르탈레스에 대한 실패한 원정을 지원했다. 칠레 의회는 1836년 12월 26일 산타 크루스의 페루 통치가 불법이며 그의 영향력이 오르베고소의 프레이레에 의한 칠레 침략 시도 지원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통합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포르탈레스에 대한 시도를 지적하며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타리하 지역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간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면서, 볼리비아가 해당 지역을 점령하고 병합했고,[5]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그 후 1837년 5월 19일 산타 크루스가 연합당 지지자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비난하며 연방에 선전포고했다. 산타 크루스가 망명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러한 비난은 사실로 드러났다.
킬로타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 포르탈레스가 발파라이소에서 암살당하면서 남부 페루 침공 준비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첫 번째 "복고 원정"이 1837년 9월 15일 발파라이소를 출발하여 킬카에 상륙하고 10월 12일 아레키파를 점령하여 10월 17일 지방 정부를 수립했다. 연방 해군은 11월 14일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를 점령했다.
11월 17일, 칠레군이 페루군에 포위된 후 마누엘 블랑코 엔칼라다가 영국의 보증 하에 파우카르파타 조약에 서명했고, 그 결과 6일 후 점령이 해제되었으며 칠레가 붙잡은 페루 선박은 반환될 예정이었다. 블랑코 엔칼라다의 군대가 발파라이소에 도착한 후 적대적인 시위에 직면했고 칠레 정부는 파우카르파타 조약을 거부했다. 마누엘 불네스가 이끄는 두 번째 원정대가 조직되었고, 1838년 7월 19일 페루로 출발했다.
6. 2. 연방의 해체
같은 시기에, 북부 페루는 1838년 7월 30일 연방에서 탈퇴했지만,[6] 1838년 8월 21일 포르타다 데 기아스 전투에서 통합 복원군에 공격받아 패배했다.[6] 한편, 칼라오의 연방군은 같은 군대에 의해 포위 공격을 받았다.이 기간 동안 연방의 안정성은 무너졌는데, 1838년 9월까지 페루(즉, 북부와 남부 페루)는 한때 7명의 대통령의 ''사실상'' 통제하에 있었다. 최고 보호자인 산타 크루스, 복원주의자 대통령 가마라, 분리주의적인 북부 페루 국가의 지도자 오르베고소, 산타 크루스가 임명한 오르베고소를 대신한 호세 데 라 리바 아구에로, 남부 페루의 대통령 피오 데 트리스탄, 북부의 도밍고 니에토, 그리고 와이라스의 후안 프란시스코 데 비달이었다.[6]
산타 크루스는 1838년 11월 10일 리마를 점령하여 칼라오 포위 공격을 종식시켰지만, 복원주의자들이 있는 북쪽으로 떠났다. 그는 1839년 1월 20일 융가이 전투에서 패배했고, 따라서 연방은 해체되었으며,[6] 가마라는 1839년 8월 25일에 해체를 선포했다.[6] 연방의 패배는 산타 크루스의 망명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먼저 에콰도르의 과야킬로, 그 다음 칠레로, 마지막으로 유럽으로 망명하여 사망했다.
연방이 패배한 후, 안토니오 우아차카와 같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새로운 페루 정부에 맞서 계속 싸웠지만, 1839년 11월 패배했다.[7]
참조
[1]
웹사이트
Decreto del 28 de Octubre de 1836 (Establecimiento de la Confederación Perú - Boliviana)
https://www.leyes.co[...]
1836-10-28
[2]
웹사이트
Ley Fundamental de la Confederación Perú-Boliviana (1837)
https://www.leyes.co[...]
1837-05-01
[3]
학술지
La presencia del Ejército restaurador en Perú (1837-1839), un vacío historiográfico
https://www.scielo.c[...]
[4]
서적
Enciclopedia ilustrada del Perú: CAN-CHO
Empresa Editora El Comercio S. A.
[5]
학술지
La anexión e incorporación de Tarija a Bolivia
https://www.tarija20[...]
2011-04-14
[6]
서적
Archivo diplomático peruano
https://books.google[...]
Ministerio de Relaciones Exteriores del Perú
[7]
서적
La historia oculta: La lucha del pueblo argentino por su independencia del imperio inglés
https://books.google[...]
Editorial Biblos
[8]
웹사이트
Peru
https://www.gov.br/f[...]
[9]
서적
Um diplomata do Império: Barão da Ponte Ribeiro
https://funag.gov.br[...]
FUNAG
[10]
서적
Exposição dos trabalhos historicos geographicos e hydrographicos que serviram de base a carta geral do imperio exhibida na exposição nacional de 1875
http://worldcat.org/[...]
Typographia Nacional
[11]
웹사이트
UNA GUÍA PARA LA HISTORIA DE LAS RELACIONES DE RECONOCIMIENTO, DIPLOMÁTICAS Y CONSULARES DE LOS ESTADOS UNIDOS
https://bo.usembassy[...]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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